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 갈때
그 옆에 앉아 상처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 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네
이 시간에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 빛이 내리는 것을
수도권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 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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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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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자성, 안대회 역, 채근담.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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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귓속에는 언제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리고
마음속에는 언제나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이 생긴다면
이야말로 덕으로 나아가고 행실을 닦게 하는 숫돌이다.
만약 들리는 말마다 귀를 즐겁게 하고
생기는 일마다 마음을 유쾌하게 한다면
이 인생을 짐새의 독에 파묻는 꼴이 되리라.
송
좁아지는 길에서는 한 걸음 멈춰
다른 사람이 먼저 가도록 내주고
맛있는 음식은 얼마쯤 덜어서
다른 사람이 즐기도록 양보한다.
이것이 세상을 잘 헤쳐 가는
지극히 안락한 하나의 방법이다.
송
바람이 잔잔해지고 물결이 조용해지자 인생의 참다운 경지를 보았고
맛이 담박해지고 소리가 드물어지자 마음의 본디 모습을 알았다.
송
분노의 불길과 욕망의 물결이 한창 타오르고 끓을 때는
분명하게 그 잘못됨을 알면서도 또 분명하게 그 잘못을 범하게 된다.
알아차린 자는 누구이고, 범한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타오르고 끓어오르는 순간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만 있다면
간사한 마귀도 문득 참다운 도인이 될 것이다.
송
내가 귀할 때 남들이 나를 떠받드는 것은
이 높은 모자와 큰 허리띠를 떠받드는 것이요
내가 천할 때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이 베옷과 짚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나를 떠받드는 것이 아니니 내 어찌 기뻐하며
본래의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니 내 어찌 화를 내랴?
송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아무리 깊어도 갚지 않고
남으로부터 받은 원한은 아무리 얕아도 갚는다.
남의 나쁜 점을 들으면 아무리 모호해도 의심하지 않고
남의 좋은 점을 들으면 아무리 뚜렷해도 의심한다.
이야말로 냉혹함의 극치이고 각박함의 으뜸이니
절실하게 경계해야 마땅하다.
송
글을 잘 읽으려는 사람은
손이 춤추고 발이 절로 뛰는 경지에 이르도록 읽어야 하니
그래야 글자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사물을 잘 관찰하려는 사람은
마음이 무르녹고 정신이 흡족한 지경에 이르도록 관찰해야 하니
그래야 외형에 붙들리지 않는다.
송
산림은 빼어난 장소이지만
조금이라도 얽매이면 시장 바닥으로 변하고
글씨와 그림은 운치 있는 취향이지만
조금이라도 탐내고 미치면 장사꾼이 되고 만다.
대개 마음이 물들어 집착하지 않으면 욕망의 세계도 선경이 되고
마음이 얽매여 빠지게 되면 즐거움의 세상도 고해로 변한다.
송
태어나기 이전에는 어떤 생김새였을지 한번 생각해 보고
죽은 뒤에는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또 생각해 보라.
그러면 온갖 생각은 타 버린 재처럼 식고
본성 하나만이 고요히 남아
자연스레 물외로 벗어나 태초의 세계에 노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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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하는 지구에서 태어난 나,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당신을 만난다 하늘에서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 나, 아무도 기록하지 않을 나, 그러나 영혼을 믿는 나, 기억들이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을 늙은 늑대 같은 외투를 입고 내 영혼은 멍하게 지켜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