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묘를 키우는 게 정신건강이 나아지는 데에 좋니?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선배가 내게 물었다. 알고 있는 학생 중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확실히 그렇지만 그를 더는 볼 수 없어질 땐 매우 허무하다고 답했다.
생명의 불이 꺼지기는 얼마나 쉬운가……, 마치 피어나지도 못한 불씨가 사그라들듯…… 연약한 몸뚱이의 모든 곳이 차갑게 굳어 단단한 토막이 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리고 남겨진 이의 광야엔 언제 다시금 비가 오는가…….
그 후로도 선배는 입양하는 것은 어디에서 하는 게 좋은지, 어린 고양이가 좋은지 좀 자란 고양이가 좋은지, 등을 물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했다. 선배는 그 학생이 약에 너무 의존하고 있기에 약을 줄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흘리듯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고, 선배는 내게 고등학교 시절 비슷한 경험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고……,
혹시나, 만약, 그 친구와 만날 자리가 생긴다면 그 친구에게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때 관객이 '나도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길 바랐고,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든 그이를 돕겠다는 다짐 역시 했었다. 그런데도 차가운 사실이 다짐을 가로막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본인이 나아지리라 마음먹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원치 않는 길을 걷게 하는 일 역시 폭력이기에 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마음을 인정한 이에게만 도움을 주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말 몇 마디로만 스케치 된 이의 모습으로부터 나의 과거를 마주하는 건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그렇지만 그이의 꿈과 좌절은 내가 그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뜨거운 진창에서 구르는 것 같던 날들, 어느 가을 아침 늦잠으로부터 깨어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마주한 이별…. 그리고 오랜 좌절. 그것들과 함께 살며 헛늙은이가 되지 않은 나의 모습까지. 그 생각을 마칠 즈음엔 이미 선배에게 차가운 사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으나, 결국 그 사람이 원한다면 그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하교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생각이 나를 따라왔다. 내가 무심코 저지를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걱정이었다. 먼저 말하기 전엔 그이의 마음속에 있는 문을 두드리지 말아야지, 또한 강제적으로 그 문을 열지도 말아야지……. 일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내가 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건 그와 상관없이 그가 그의 길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3월 10일 4시 언저리에 이 일기를 연이어 씀.
일기를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인데 그것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며칠 전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일기에 관한 얘기가 나왔고, 나는 모처럼 옛날 생각이 나 나의 예전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곳에 쓰인 글은 시간이 지나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몇 살을 더 먹은 채로 나의 모진 땅을 살폈다. 내가 보기에도 어린 나는 고통스러웠고,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가장 어두운 곳에 정좌하기를 택한 듯했다. 서늘하고 시적인 문장은 모두 슬픔으로 빚어진 옷걸이에 목을 매고 있었다.
나 자신의 일기를 보는 건 제법 객쩍은 구석이 있어 좋지만은 않았지만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곳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의 나와 이곳의 나는 여러모로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문장부호가 정확히 찍혀있지 않은 글은 일부러 쓰고자 하여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문장부호를 따지고 드는 것이 꼭 삭막한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찔리기도 한다. 그래서 예전보다 덜 슬퍼하고 덜 분노하는 건가. 그렇지만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나의 기저를 꾹 누르며 올라오는 울컥함과 아름다운 것을 볼 때 흐르는 감동의 눈물은 아직 내가 기계가 아니라고 속삭인다.
과연 미래의 나는 이 일기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비슷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만은….
글을 올리기 직전 덧붙여서 씀.
공부를 다시금 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할 땐 지루하던 것들이 이해를 하고 나니 재미있다. 앞으로도 많이 읽고 해석하며 배워야겠다.
3월 10일 3시 26분에 첫 문장을 씀.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유기묘를 키우는 게 정신건강이 나아지는 데에 좋니?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선배가 내게 물었다. 알고 있는 학생 중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확실히 그렇지만 그를 더는 볼 수 없어질 땐 매우 허무하다고 답했다.
생명의 불이 꺼지기는 얼마나 쉬운가……, 마치 피어나지도 못한 불씨가 사그라들듯…… 연약한 몸뚱이의 모든 곳이 차갑게 굳어 단단한 토막이 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리고 남겨진 이의 광야엔 언제 다시금 비가 오는가…….
그 후로도 선배는 입양하는 것은 어디에서 하는 게 좋은지, 어린 고양이가 좋은지 좀 자란 고양이가 좋은지, 등을 물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했다. 선배는 그 학생이 약에 너무 의존하고 있기에 약을 줄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흘리듯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고, 선배는 내게 고등학교 시절 비슷한 경험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고……,
혹시나, 만약, 그 친구와 만날 자리가 생긴다면 그 친구에게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때 관객이 '나도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길 바랐고,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든 그이를 돕겠다는 다짐 역시 했었다. 그런데도 차가운 사실이 다짐을 가로막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본인이 나아지리라 마음먹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원치 않는 길을 걷게 하는 일 역시 폭력이기에 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마음을 인정한 이에게만 도움을 주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말 몇 마디로만 스케치 된 이의 모습으로부터 나의 과거를 마주하는 건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그렇지만 그이의 꿈과 좌절은 내가 그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뜨거운 진창에서 구르는 것 같던 날들, 어느 가을 아침 늦잠으로부터 깨어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마주한 이별…. 그리고 오랜 좌절. 그것들과 함께 살며 헛늙은이가 되지 않은 나의 모습까지. 그 생각을 마칠 즈음엔 이미 선배에게 차가운 사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으나, 결국 그 사람이 원한다면 그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하교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생각이 나를 따라왔다. 내가 무심코 저지를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걱정이었다. 먼저 말하기 전엔 그이의 마음속에 있는 문을 두드리지 말아야지, 또한 강제적으로 그 문을 열지도 말아야지……. 일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내가 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건 그와 상관없이 그가 그의 길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3월 10일 4시 언저리에 이 일기를 연이어 씀.
일기를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인데 그것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며칠 전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일기에 관한 얘기가 나왔고, 나는 모처럼 옛날 생각이 나 나의 예전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곳에 쓰인 글은 시간이 지나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몇 살을 더 먹은 채로 나의 모진 땅을 살폈다. 내가 보기에도 어린 나는 고통스러웠고,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가장 어두운 곳에 정좌하기를 택한 듯했다. 서늘하고 시적인 문장은 모두 슬픔으로 빚어진 옷걸이에 목을 매고 있었다.
나 자신의 일기를 보는 건 제법 객쩍은 구석이 있어 좋지만은 않았지만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곳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의 나와 이곳의 나는 여러모로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문장부호가 정확히 찍혀있지 않은 글은 일부러 쓰고자 하여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문장부호를 따지고 드는 것이 꼭 삭막한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찔리기도 한다. 그래서 예전보다 덜 슬퍼하고 덜 분노하는 건가. 그렇지만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나의 기저를 꾹 누르며 올라오는 울컥함과 아름다운 것을 볼 때 흐르는 감동의 눈물은 아직 내가 기계가 아니라고 속삭인다.
과연 미래의 나는 이 일기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비슷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만은….
글을 올리기 직전 덧붙여서 씀.
공부를 다시금 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할 땐 지루하던 것들이 이해를 하고 나니 재미있다. 앞으로도 많이 읽고 해석하며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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